[시계점문점]
먹이를 찾기 위해 바다로 뛰어드는 북극곰. 영국의 BBC와 독일의 그린라이트 미디어가 11년 동안이나 촬영한 다큐멘터리 ‘지구’는 극영화보다 더 감동적인 생명의 신비를 보여준다.

반성한다. 가장 긴박한 추격전, 가장 환상적인 마술, 가장 숭고한 고난은 인간의 것이라는 오만한 생각을.

9월4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지구’는 생명을 만드는 단 하나의 별인 지구를 북극에서 남극까지 훑어나간다. 일류 배우의 연기도, 기묘한 컴퓨터 그래픽도 없이 정직하게 자연을 담아내기만 했건만, 그 어떤 극영화보다 놀라운 풍경이 펼쳐진다.

아빠 북극곰은 24시간 내내 어둠이 내린 북극의 얼음판을 먹이를 찾으러 가로지른다. 엄마 북극곰과 아기들은 겨울잠에서 갓 깨어나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핀다. 그러나 먹이를 찾기는 쉽지 않다. 지구의 온도가 높아져 얼음이 빨리 녹기 시작했고, 사냥터로 가는 길은 예전보다 훨씬 험난해졌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북극곰의 운명에 잠시 눈감은 채 남쪽으로 내려간다. 광활한 툰드라 지대를 이동하는 순록떼와 이를 뒤따르는 늑대가 등장한다. 늑대는 무리에서 떨어진 어린 순록을 노린다. 수많은 동물 다큐멘터리에서 보아온 장면이지만, 다시 한번 긴박감이 넘친다. 액션 영화의 자동차 추격전이 이보다 아슬아슬할까.

삼림한계선에는 눈덮인 침엽수림이 장엄하게 펼쳐져있다. 뾰족한 잎은 동물들의 먹잇감이 되지 않기에, 이곳은 온전히 나무들만의 공간이다. 나무들은 침묵 속에 장쾌하게 하늘로 솟았다. ‘반지의 제왕’에 나올법한 신성하고 고요한 숲이다.

적도의 우림은 지표면적의 3%지만, 동·식물의 50%가 밀집해 살아간다. 뉴기니 섬에선 머리 속에서조차 그려본 적이 없는 기묘한 새가 등장한다. 전 세계에 42종이 존재한다는 극락조다. 아름답다 못해 괴상해 보이는 날개와 깃털을 펼쳐놓고 구애하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하다. 자연은 언제나 인간의 옹졸한 상상력을 넘어선 형상을 만든다.

바짝 마른 칼라하리 사막을 건너는 코끼리 떼의 자취를 추적하면서 영화 중반부 하이라이트가 시작된다. 건기가 되면 코끼리들은 먹이와 물을 찾아 몇 주간이나 사막을 횡단한다. 단테가 ‘신곡’에서 묘사한 지옥이 이런 곳일까. 지독한 모래 폭풍이 진로를 막아도 코끼리들은 선조로부터 전해온 감각에 의존해 물을 찾아나선다. 도중에 마주친 조그만 물웅덩이를 두고 사자 떼와 불안한 동거를 하는 코끼리. 아프리카의 두 강자 코끼리와 사자의 대립은 오랜 원한으로 맞선 갱스터 영화 속 두 마피아 가문을 닮았다.


쇠재두루미떼는 히말라야 산맥을 날아 넘는다. 최고의 산악인들이 목숨을 걸고 간신히 발을 내디디는 곳이다. 그때 신의 손길 같은 구름이 생성된다. 구름은 기적처럼 비를 만들고, 비는 폭포가 돼 거대한 물줄기로 흐른다. 물은 아프리카의 대평원에 흘러넘치고, 마침내 코끼리는 물웅덩이에서 평화를 찾는다.

종반부 주인공은 혹등고래다. 먹이를 찾는 혹등고래 모자는 적도에서 남극까지 지구 반 바퀴를 헤엄쳐간다. 바닷속에서 멀리 퍼져가는 혹등고래의 울음소리는 존 케이지의 현대음악 같이 신비롭다.

영국 BBC와 독일 그린라이트 미디어가 함께 제작했다. 40여명의 카메라맨이 4500일간 담아낸 영상이다. 독일, 일본 등에서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고, 한국에선 5월 제5회 서울환경영화제 개막작으로 첫 선을 보였다. 한국판 내레이션은 배우 장동건이 맡았다.

그래서 초반부에 등장했던 아빠 북극곰은 어떻게 됐을까. 카메라는 다시 북극으로 향해 북극곰의 슬픈 운명과 인간의 의무를 웅변한다. 앨 고어의 강의(영화 ‘불편한 진실’)를 듣기보다는 지구의 경이로운 풍경에 감탄하는 편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행성의 소중함을 깨우치기 쉬운 방법일 것이다. 이태백의 시에 구스타프 말러가 곡을 붙인 ‘대지의 노래’ 중 한 구절을 떠올려봄직하다. ‘창공은 영원히 푸르고/대지는 장구히 변치 않으며 봄에 꽃을 피운다/그러나 인간아, 그대는 대체 얼마나 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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